무쌍의 역사 (1): 한예리 편

 

배우를 구분하는 분류 중에 ‘한예종 상’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기본적으로 수수한 외모에 쌍꺼풀이 없는 배우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나 여자 배우들에게 이 수식어가 자주 따라오는데, 최근에는 <이태원 클라쓰>로 떠오른 배우 김다미가 간만에 이 계보(?)를 이었다. 김다미가 가장 핫하긴 하지만, 알다시피 그의 대표작으로는 앞서 말한 <이태원 클라쓰>로 드라마 한편, <마녀>로 영화 한편밖에 없다. 그러니 혹 김다미에게 반한 사람이라면 과거 무쌍의 역사를 장식한 다른 여자 배우들의 필모그라피를 살펴봐도 괜찮을 듯하다. 앞으로 세 배우에 걸쳐 각각 다섯 작품씩 다룰 예정이며, 첫 번째 편은 가장 활동 경력이 많은 1대 무쌍 한예리다. 수많은 독립영화에서 자신의 매력을 뽐내온 그가 특히나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을 함께 살펴보자. 순서는 개봉연월일 순이다.


 

남쪽으로 튀어 (2013)

누군가는 예술이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킬링타임용 영화가 아니라면, 무언가 거세하고 묵과하며 말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입장이라 가정하면, 예술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그래서 위의 명제는 어쩌면 이렇게 바꾸는 게 맞을 듯하다. ‘어떤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느냐가 작품의 예술적 성취보다 우위에 있거나 평가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 지점에서 함정에 빠지기 쉬운 영화다. <공중그네>로 잘 알려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운동권 세대인 해갑(김윤석 분)이 아나키즘에 입각, 가족의 삶을 이끌며 전개된다. 그 자체는 문제라기보다 되레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문제는 이를 바탕으로 극중 사건의 갈등이 속 시원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의 메시지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해갑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단편적이고 기능적으로만 소비된다. 첫째 딸 민주(한예리 분)만 보더라도 사회에 편입하려다 들섬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해갑의 가치관을 강화하는 용도로만 이용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제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의 한예리라고 하더라도 빛이 나긴 어려웠다.


 

환상속의 그대 (2013)

많은 배우가 그렇겠지만, 한예리는 특정한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두 번 이상 협업한 기록이 꽤 많다. 특이하다면 한 감독과 오래 인연을 유지하며 예술 세계를 공유하는 식은 아니고 여러 감독과 그러한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춘몽>이 나오기 전에는 <필름시대사랑>이 장률 감독과의 매개체가 되었다. 김종관 감독과는 <최악의 하루>에 이어 <더 테이블>이, 그리고 강진아 감독과는 <백년해로외전> 이후 <환상속의 그대>로 연속성을 가진 바 있다. <환상속의 그대>는 <백년해로외전>의 기본적인 상황 설정과 관계 구도를 공유하면서도 분량이 늘어난 만큼 주제 의식이 더욱 심화한 장편 영화다. 한예리는 이 영화에서 혁근(이희준 분)의 여자친구 차경으로 등장한 지 5분 만에 죽는다. 파격적인 결과를 먼저 제시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나 싶겠지만, 차경의 죽음은 오히려 이후 이어지는 혁근의 망상과 기옥(이영진 분)과의 오묘한 관계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그로써 영화는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의 회한, 집착, 욕정 등을 꽤나 훌륭하게 그려낸다.


 

극적인 하룻밤 (2015)

로맨틱 코미디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밀고 당기기가 핵심이다. 성별의 문제를 떠나 장르 특성상 수많은 이가 설명하려 들었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정의가 모호한 사랑을 중심으로 한 당사자들의 오묘한 관계가 극의 탄력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쪽만 너무 밀거나 당기고, 다른 한쪽이 너무 밀림과 당김을 당하기만 하면 캐릭터가 평면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2009년 시작된 대학로 연극을 베이스로 한 <극적인 하룻밤>은 그 탄력이 중반에 이르러 탁 풀려버려 아쉬운 작품이다. 자신의 애인을 서로의 애인에게 빼앗겼다는 설정은 초반을 그런대로 흥미롭게 만들지만, 첫 섹스가 있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정훈(윤계상 분)과 시후(한예리 분)가 둘도 없는 천생연분처럼 보이기만 한다. 관계를 고민하는 구간은 짧고, 해소를 위한 유사 연애와 육체적 교감만 길다. 황당한 물구나무서기와 함께 얼렁뚱땅 나오는 해피 엔딩까지, 보다 보면 이미지가 잘 맞고 연기가 준수해서인지 문득 지난해 개봉한 김래원, 공효진 주연의 <가장 보통의 연애>를 두 배우가 소화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최악의 하루 (2016)

한예리가 가장 사랑스러워 보이는 영화가 보고 싶다면 역시나 <최악의 하루>다. <김종관과 두 번 만난 그녀들>에서도 간단히 소개한 이 영화는 안소희, 정유미, 아이유, 그리고 한예리와 함께한 바 있는 김종관 감독의 은은한 감성이 유일하게 긴 호흡으로 담긴 확실한 커리어 하이다. 세 남자 사이에 한 여자가 놓인다는 설정은 이동진이 말한 것처럼 <우리 선희>와 형식적으로 닮아 있다. 다만, <우리 선희>는 솔직한 말속에 욕정의 진의를 꽁기꽁기 숨긴다. 반대로 <최악의 하루>는 거꾸로 상대에게 보여주는 서로 다른 상(像) 안에 진솔한 감정을 담는다. 이는 감정과 태도는 분명히 드러나되 표정은 알 듯 말 듯한 은희를 연기하는 한예리를 통해 일정하게 수렴된다. 수줍고 비굴하고 옹색할 때는 있어도 최소한 이율배반적으로 군 적은 없어 이해되는 여자라, 그 어떤 배우가 한예리보다 이런 캐릭터를 더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처음 만난 남자, 계속 만난 남자, 만나다 만 남자, 그리고 극장에서 만난 남자들이 서촌과 남산의 은희에게 감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춘몽 (2016)

양익준, 윤종빈, 이주영(이상 주조연). 신민아, 유연석, 강산에, 김의성(이상 특별출연).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동생이자 제작자 이준동까지, 이게 무슨 별안간 엄청난 초호화 캐스팅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의 장률 감독은 시종일관 평범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일상을 보여주기만 한다. 감독이 이주민의 이야기를 자주 다뤄온 편이기에 이번에도 주인공은 탈북자로서 삐걱이는 삶을 사는 예리(한예리 분)다. 한예리는 이 영화 외에도 <푸른 강은 흘러라>, <코리아>, <해무> 등에서 반도 위쪽에 살고 있는 역할을 소화한 바 있다. <춘몽>에서는 앞서 언급한 다른 영화에서보다 일상성과 서정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알맞게 차분한 관찰자이자 상황의 촉매로서 극을 이끌어 나가는 편이다. 지극히 사실적인 여러 인물들은 그를 중심으로 영화적인 삶, 삶을 닮은 영화, 꿈 같은 현실, 현실을 반영하는 꿈속에서 생(生)의 불완전성에 녹아 있는 미(美)와 비(悲)를 몸소 말한다. 2016년 열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CREDIT

에디터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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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choi 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기대도 됩니다!
hjchoi 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다음이 누군지 예상은 되지만
hjchoi 님이 좋아합니다.
귀요미😜 님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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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dy 님이 좋아합니다.
켄짱 님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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