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농담을 던지는 여자들

 

세상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우리가 TV에서 흔히 보는 착하고, 예쁘고 순진무구한 그런 여자들 말고도 말이다. 여전히 한국인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교 DNA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의식을 드러내고 남을 지적하고 불평을 쏟아내는 여자들은 그간 방송에 드러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그 한계를 부수고 등장한 개그우먼이 바로 안영미였다. 가슴을 드러내는 춤을 추고, 김구라에게 핀잔을 주며 순진한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환영했던 이유는 아마 여성이라는 한정된 이미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래코기’라 불리며 국민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박나래가 그다음 주자로 바통을 넘겨받았다. 지난 16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섹스, 섹스, 그리고 섹스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드는 그가 반가운 이유도 여전하다. 여자가 가감 없이 자신의 말을 쏟아내는 장면을 더 많이 보고 싶어서, 박나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여성이 다양한 주제로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헤테로(이성애자)든, 레즈비언이든, 미혼이든, 기혼이든, 가냘프든, 통통하든, 스스로의 생각을 시원하게 내뱉는 여자들이 한국 매체에도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해보았다. 박나래와 해외 여성 코미디언이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쏟아낸 말, 말, 말.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물론 제가 여자 연예인도 웃통 까야 되는 날이 와야 한다고 항상 얘기했던 사람이에요.

(…)

막말로 남자들은, 더운 날 ‘야 우리 더운데 웃장 까고 농구 한 판 하자’ 이러면 여자들도 이제 이래야 돼요.

야 더운데 웃장 까고 티라미수 한 판 하자’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中 12:29 ~ 12:47

 

 

번쩍이는 형광 주황 바지에 뱀피 나시를 입은 박나래는 옆집 언니처럼 친근한 농담을 던진다. 금방이라도 그와 함께 웃장 까고 티라미수 한 판 하고 싶어진달까. 사실, 이 정도 발언은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서는 꽤 귀여운 편. 음흉한 표정으로 손짓 발짓 다 쓰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물론, 연애와 19금 에피소드를 술에 술 말 듯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귀여운 박나래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제는 찐득한 박나래도 알아가야 할 차례다.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마리 테레즈 발터가 피카소를 만난 건 17살 때였어요.

미성년자였을 때죠. 42세 피카소는 명성 높은 유부남이었고요.

문제 있느냐고요? 네!

하지만 피카소는 자신도 그녀도 모두 한창 때라며 괜찮댔어요.

그걸 읽은 게 17살 때였는데 제가 얼마나 암울했는지 아세요?

‘지금이 내 한창 때라니. 한창이 아니라 한참 먼 것 같은데’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中 53:20 ~ 13:56

 

 

한자리에 서서, 별다른 제스처 없이 꼿꼿한 스탠드 마이크를 붙잡고 비꼬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해나 개즈비.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농담을 던지기도, 불도저 같은 목소리로 부당한 것에 화를 내기도 한다. 톡톡 튀는 호주 억양과 맞물리는 익살스러운 표정은 덤. 쇼는 예술사를 전공한 코미디언답게, 미술의 거장들을 불러내 비유하고 조롱하며 이어진다. 끄트머리에 코미디와 유머에 대한 진지한 철학도 담아내니 그저 웃기만 할 순 없는, 그러나 꼭 추천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다.


 

엘런 디제너러스: 공감능력자

 

(제가 커밍아웃한 이후에) 할리우드 클로짓 게이들이 다 커밍아웃할 줄 알았어요.

마치 야생 코끼리 떼처럼 할리우드의 게이 배우들이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작은 미어캣들처럼 미어캣 구멍에서 나오더군요.

‘엘렌 괜찮을까? 커밍아웃하기 전에 어떻게 될지 보고 싶어.

아니, 이거 안 좋은데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좀 더 숨어 있을래’

<엘런 디제너러스: 공감능력자> 中 6:57 ~ 7:25

 

 

화면에 미어캣까지 띄워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장면으로 유명하다. 쇼 내내 엘렌 디제너러스의 목소리는 쉽게 높아지지도, 낮아지지도 않는다. 그저 일관된 톤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그가 던지는 말들은 촌철살인과도 같다. 시종일관 웃으며 유머로 허를 찌르니 따라 웃을 수밖에. 인터뷰 위주의 <엘렌 디제너러스 쇼(The Ellen DeGeneres Show)에만 익숙해진 대중에게 사실은 나도 이렇게 웃길 줄 안다며 끊임없이 어필하는 느낌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어필에 웃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싶다.


 

앨리 웡: 베이비 코브라

 

병원 진료날마다 남편이 꼭 같이 간다고 하면 다들 남편 칭찬하기 바빠요.

‘어머, 병원에 매번 같이 간단 말이야? 정말 좋은 남편이다’

저는요? 주인공은 저라고요. 제가 같이 안 가면 화면에 나올 것도 없어요.

그런데 나 피 뽑는 동안 게임한 거로 칭찬 받는다니요.

반면에 제가 환각제라도 먹으면 나쁜 엄마 취급을 받겠죠.

<앨리 웡: 베이비 코브라> 中 54:45 ~ 55:15

 

(본 영상은 <앨리 웡: 베이비 코브라>가 아닌 <앨리 웡: 성性역은 없다>의 트레일러입니다.)

이토록 임신과 육아, 결혼을 소재로 삼아 웃긴 코미디언이 또 있을까. 까무잡잡한 피부에 빨간 뿔테를 쓴 앨리 웡. 임신 7개월 차에 불룩하게 나온 배를 드러내고 무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귀여운 분홍색 젤리 슈즈와는 상반되게 그는 쇼 내내 화를 내며 눈썹을 치켜세운다. 임신한 여성의 삶과 미국에서 사는 동양인의 삶을 적절히 섞어 자조적인 유머로 풀어내니, 새로운 소재로 웃고 싶었던 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코미디다.


 

일라이자 슐레싱거: 좀 아는 여자

 

영화 속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는 건 강한 여자, 웃기는 여자, 용감한 여자, 똑똑한 여자, 독선적인 여자가 아니었어요.

저 같은 여자는 빌어먹을 스티브 잔이나 조나 힐이나 만나죠.

승리자는 언제나 조신한 소녀예요. 그런 소녀가 채닝 테이텀을 만나죠.

그 소녀는 웃기지도 않고 독선적이지도 않죠.

거기에 깔린 맥락은 이거예요. ‘그래, 소녀들아 남자는 수다스러운 여자를 싫어해, 그러니 입 닫으렴.’

<일라이자 슐레싱거: 좀 아는 여자> 中 22:29 ~ 23:10

 

 

깔끔하게 올려 질끈 묶은 머리를 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남녀관계에 대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일라이자 슐레싱거. 그의 농담이 여타 코미디언에 비해 한층 돋보이는 이유는 몸을 아끼지 않는 무대 매너 때문이다. 관객들 앞에서 뛰어다니며 동물 흉내를 내기도 하고, 기계에 대입해 아나운서 톤을 또박또박 뱉기도 하는 그는 팔색조가 따로 없다. 폭로에 가까운 유머를 듣고 있으면 꼭 사이다를 마신 듯한 기분이니, 왜인지 속이 답답한 사람이라면 당장 일라이자 슐레싱거의 쇼를 보도록.

CREDIT

에디터 최예은

​온갖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해 통장 잔고가 늘 위태롭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밥 먹듯이 드라마 시청 중. 넷플릭스 가입하고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제 기사를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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